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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함께 돋아나는 기억
사인트래블 - 빛고을, 광주
글 황예하 2021-07-27 |   지면 발행 ( 2021년 8월호 - 전체 보기 )




▲ 무등산 등산로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 우리나라의 21번째 국립공원인 무등산은 2018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인증을 받은 세계적 지질명소이자 광주 역사, 문화가 담긴 곳이다.

비와 함께 돋아나는 기억
빛고을, 광주

지문의 생김새가 어떻냐는 질문을 받은 것 같았다. 혹은 머리카락의 개수를, 손톱이 자라는 데 걸리는 시간을. 평생 단 한 번도 여행하게 되리라 생각해 본 적 없는 도시로 떠난다는 건 그와 비슷한 일처럼 느껴졌다. 이번 목적지는 사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들처럼, 여행에 대한 발제조차 떠올릴 이유가 없는 곳이다. 거긴 지도 앱을 켤 일이 없어 종일 스마트폰 배터리가 닳아질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동네니까. 이곳을 칭하기 위해 줄 세운 앞선 다섯 문장을 단 두 글자로 줄이면 그 단어는 ‘고향’이 된다. 집으로 떠나는 여행, 오랜만에 만나는 도시에게 건넬 인사는 두 가지였다.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처음 뵙겠습니다.
글 황예하 기자 / 사진 황예하 기자, 메가볼트
 
 
 

내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일


▲ 소위 ‘힙한’ 카페와 식당, 문화 공간들이 동리단길 카페거리를 넘어 동명동 구석구석으로 번지고 있다. 사진은 전남여고 뒷길에 자리한 라멘가게 ‘삼류’의 간판. 비가 맺힌 검은 입체문자사인의 광택이 운치 있다.

출장 짐을 챙기면서 이렇게까지 생각 없이 아무거나 대충 집어 던져넣은 건 또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어차피 거기 가면 다 있어. 빈자리가 너무 많아 덜 채운 것처럼 보이는 가방을 내려다보며 내뱉었던 혼잣말은 근거 있는 자만의 조각이었다. 여행자들이 흔히 말하는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라는 일종의 관용구와 비슷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건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이번 목적지가 ‘거기는 내가 살던 곳이니까’로 정리되는 지역이라서다.

광주는 머물다 떠나기 전까진 어떤 경험을 채워갈 수 있는 여행지라고 정의할 수 없는 곳이다. 꼭 손금을 보는 일처럼. 누가 읽느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깊이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손바닥 같은 곳. 그래서 특히 익숙한, 골목골목이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한 구도심 인근으로 향했다. 문화와 역사가 넝쿨처럼 얽힌 도시의 정신이자 중심으로. 비가 조금 쏟아지고 있었지만, 요 정도 비는 유별난 것도 아닌 광주에 왔으니까.

시청을 필두로 발전한 신도심이 나날이 성장하고 있지만, ‘시내’라는 상징성의 소유권은 여전히 옛 전남도청과 인근 상권이 가지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거듭난 옛 전남도청을 시작으로 광주제일고등학교까지 뻗은 금남로를 포함한 충장동 일대가 전통적인 시내 상권이라면, 그 양쪽에 자리한 동명동, 양림동은 새롭게 부상한 핫 플레이스라 할 수 있다.


▲ 광주극장 매표소 위를 장식한 간판. 지난해 올라간 이 손간판은 시민들이 직접 좋아하는 영화를 고르고 손수 그려 더욱 의미가 깊다.

인근에 고등학교만 8개, 조선대학교 정문에서는 도보로 채 15분이 걸리지 않는 위치인 이 상권은 골목을 걷는 재미가 쏠쏠한 동네다. 한창 유행 타는 젊은 유동층이 자주 드나드는 이곳은 금남로를 중심으로 왼쪽엔 양림동이, 오른쪽엔 동명동이 있는데 두 동네가 서로 다른 유행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접한 중, 고등학교 학생들이 시험 기간마다 삼삼오오 모여 공부를 하던 중앙도서관을 낀 동리단길 카페거리는 망원 같기도, 합정 같기도, 때로는 성수를 닮은 것 같기도 한 힙한 카페들이 더러 모인 골목이다. 길이 비교적 단순하게 구획된 충장로와 달리 오르락내리락 엉키며 장동교차로를 휘감고 엮인 모양새지만, 그 모양이 오히려 걷는 맛을 배가한다. 동리단길은 물론 건너편 전남여고 뒷길까지 구석구석 ‘힙한’ 가게들이 피어나고 있으니 날이 맑다면 찬찬히 걸으며 광주 트렌드 탐색의 시간을 가져 보기에 알맞은 곳이다.

 

푸름이 쏟아져야 비로소 맑음


▲ 골목마다 벽화와 정크아트, 각종 조형물이 세워져 있어 어디에 서도 포토존이 되는 양림동 ‘펭귄마을’. 인스타그래머블한 동네가 되기까지 주민들이 쏟은 애정과 시간을 걸음마다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상경 첫해 겨울. 대도시의 맛에 흠뻑 취했던 내게 번뜩 실망감을 안겨준 것은, 다름 아닌 강설량이었다. 일단 눈이 내렸다 하면 발목 높이는 예삿일인 광주는 여름 역시 구름이 스스로를 쥐어짜 맑은 봄가을 하늘을 선물하는 지역이다. 그런 광주 기후와 전날의 장대비를 떠올리며 장우산을 들고 나선 여행 둘째 날, 거짓말처럼 희어진 비구름이 서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집 떠난 사이 고향 땅이 나만 빼고 약속을 바꾸기라도 한 것처럼.

흐린 하늘 아래 찾은 양림동은 충장로나 동명동에 비하면 조금 낯선 동네였다. 꼭 그날 날씨같이, 알고는 있었는데 알던 것과 많은 것이 달라져서 낯선 동네. 시간이 흐르며 시나브로 다른 동네가 되어버린 양림동은 지역 주민들로부터 비롯한 자생적인 문화관광지로 자리매김한 광주의 새로운 자랑거리다.

100년이 넘은 선교사 사택과 광주 최초의 여학교, 무등산에 안긴 시가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각종 미술관과 기독병원. 그런 것들이 양림동엔 비정형적으로 모여있다. 각자의 역사 위에 터를 닦아 모이게 된 이 관광지에서 무엇보다 눈여겨볼 만한 포인트를 꼽자면 ‘사람’이 그 주인공이 될 게 분명하다. 광주에서 가장 ‘인스타그래머블’한 장소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양림동 펭귄마을도 지자체가 아닌 동네 사람들의 손에서 시작됐으니까.


▲ 이이남 스튜디오 1층 갤러리 카페 내부 모습. 광주 비엔날레와 서울 스퀘어 등에 다양한 미디어 아트 작품을 선보였던 이이남 작가의 특징이 도드라지는 공간이다. 이이남 갤러리 카페는 카페와 스튜디오 공간 곳곳에 디지털 사이니지를 활용한 시시각각 변화하는 작품을 전시 중이다.

정크아트와 알록달록한 조형물, 벽화와 사인으로 꾸며진 마을이 주민들의 노력으로 찬찬히 개화하기까지 있었던 우여곡절은 마을 주민들에겐 모두 사건이다. 키 낮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인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뻔한 적도 있었고, 지금은 정크아트와 색 짙은 그림으로 채워진 예쁜 집들도 화재 이후 짧지 않은 시간 방치되었던 적도 있었다.

지금 여행객들이 그런 아픔의 흔적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마을공동체가 의기투합해 불어넣은 새 활기 덕분이다. 좁다란 길은 매끈해졌고, 두리번 사진 찍을 곳을 찾는 여행자들은 관광안내소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주민들이 먼저 시작하고 지자체가 뒤따라 힘을 보탠 결과다.

여행자들이 찾을 만한 스폿이 또렷해지자 마을의 색깔도 전에 없이 선명해졌다. 비가 쏟아진 뒤 구름이 간데없이 흘러갔듯이, 양림동의 생채기도 새로운 희망 너머로 아물어 사라졌다.

 

유별하지 않더라도 울렸다면 예술


▲ 기와 모양 지붕과 정크아트가 담장 하나를 두고 뒤섞인 갤러리 고철을 배경으로 보는 작품 ‘별별동네(강근선)’의 제목이 절묘하다. 별별 예술이 모인 마을에 썩 어울리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광주 시민들이 타지 사람에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음식도, 사투리도, 기아 타이거즈에 대한 이야기도 아닌 무등산 수박에 대한 궁금증이다. 씨가 없어 특별하다는 그 수박은 정작 광주 사람들도 자주 맛보지 못하는 무등산의 귀하신 유명인사인데, 사실 무등산에서 맛볼 수 있는 진짜 특산품은 예술이다.

양림동에서 이이남 갤러리를 등지고 학동 방향으로 무등산을 향해 지도를 펼치면 그 짧은 거리에도 이름 굵직한 미술관을 못 해도 세 군데는 찾을 수 있다. 줄기를 따라 열린 수박마냥 주렁주렁 사이좋게 자리 잡은 드영미술관과 무등현대미술관이 무등산 진입로에 있고, 그 둘을 지나쳐 증심사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호젓한 산자락 사이 그림처럼 들어앉은 의재 미술관을 만나게 된다.


▲ 지나간 여러 해 동안 등산객들을 향해 쓰레기 투기를 삼가 달라고 읍소해왔을 반달가슴곰 모자 앞에 새로운 팻말이 추가됐다. 전례 없는 전염병 사태가 만들어 낸 계곡물 소리보다 서늘한 사인이다.

무등산과 가장 가까운 삶의 터전인 성촌마을에 자리한 드영미술관과 무등현대미술관은 지나치기 쉽지만 지나치면 아쉬운 곳이다. 무등처럼 첩첩이 짙은 산을 배경으로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흔치 않으니까. 그런 면에서는 의재미술관이 지나칠 수 없는 풍경을 가지고 있다.

2001년 개관해 20주년을 앞둔 의재미술관은 지난한 세월을 보내온 것에 비하면 아는 사람이 많다고 하기는 어려운 장소다. 미술관이 되고자 하는 것은 자연을 헤집고 들어와 우뚝 선 강인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니라, 자연을 담아내는 화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의재미술관은 현재 노후한 시설을 개선하고 더 좋은 프로그램으로 방문객을 만나기 위한 휴관에 들어섰지만, 등산로 가장자리에 조심스레 얹어진 건물은 슬쩍 넘어다보는 것만으로 그 안의 창가를 그리워하도록 만든다. 코로나19가 잦아들고 기나긴 휴관이 끝나면 가장 먼저 돌아가고 싶은 화폭 같은 창가를.
 
 
※ 위 내용은 기사의 일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사인문화 8월호를 참고하세요.

<SignMunhwa>

위 기사와 이미지의 무단전제를 금지합니다. 

관련 태그 : 광주광역시 동명동 양림동 무등산 광주극장 의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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