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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공원, 천년고도 경주
글 황예하 2021-11-25 |   지면 발행 ( 2021년 12월호 - 전체 보기 )




▲ 경주시립도서관중앙분관 앞에 놓인 입체문자사인. 내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큼직한 지명 사인 앞에서 방문 인증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간의 공원, 천년고도 경주

나이테가 있는 바람이 산 너머에서 유유히 흘러 넘어오는 곳. 기나긴 시간이 표토처럼 쌓여 단풍이 더 짙게 물드는 자리. 경주는 그런 곳이다. 역사는 활자로 마무리된 게 아니라 오늘까지 포함한다는 걸 살갗으로 느끼게 되는 도시. 아주 오래된 것과 얼마나 오래될지 아직은 알 수 없는 것들이 혼재하는, 경주.

글 황예하 기자 / 사진 황예하 기자, 메가볼트

본 기획 취재는 국내 콘텐츠의 발전을 위하여 (사)한국잡지협회와 공동으로 진행했습니다.
 
 

단원 이상의 깊이가 있는 도시

▲ 황리단길 기와지붕 아래 서로 다른 콘셉트로 연출한 두 가게의 전경. 황리단길에 있는 수많은 한옥은 모두 구조와 규모가 조금씩 달라 한옥과 사인의 다양한 조합을 감상할 수 있다.

이미 너무 유명한 관광지를 찾는다는 것은 조금 어려운 일이다. 수많은 사람이 그 도시를 잘 알고 있고, 설명해두었고, 같은 목적을 위해 찾아올 것이다. 도시가 가진 이미지가 이미 확고하다는 뜻이다.

심지어 여행 후기가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다. 경주는 한반도 땅 위에 흐르던 세 개의 역사를 통일해 하나의 국가로 만든 나라의 수도였다. 천 년이나 그 지위를 유지한 도시였던 덕에 경주라는 이름을 들어보기도 전에 교과서에 기술된 이야기로 먼저 접하게 된다. 그다음은 소풍, 수학여행.

도시를 향한 관심이 아닌, 필요에 의한 학습을 위해 먼저 ‘외운다’. 만약 국사 시험 점수라도 시원치 않았던 사람이라면 경주에 대한 첫인상이 여간 묘해지는 게 아니다. 하지만 경주는 그런 기억만으로 마무리 지어버리기에는 적잖이 아쉬운 곳이다. 역사와 역사 사이에 끊김은 없고 시간은 단지 흐르고만 있었음이 피부에 와닿는 곳.
 
 

상식보다 오래가는 농담의 낙락함


▲ 한 찰보리빵 전문점의 대형 사인. ‘찰보리빵 탄생한 집’이라는 문구에 맞추어 찰보리빵 이미지 위에 아기들이 물고 다니는 공갈 젖꼭지를 합성했다. 아주 멀리서 발견하고 가까이 가는 내내 실없는 웃음이 나왔던 간판.

경주는 가장 대표적인 유적과 상권이 한 몸처럼 붙어있기 때문에 지근거리마다 또 다른 볼거리가 등장하는 관광지다. 방금 지나온 바닥 아래에도 무언가 묻혀 있을지 모른다. 유적이 많은 도시인 만큼 적당한 도움과 안내가 필요했다. 그래서 보통 때라면 찾지 않을 프로그램에 참여해보기로 했다.

투어 해설사의 재치 있는 이야기와 함께 지금은 ‘동궁과월지’가 된 안압지, 경주하면 빼놓을 수 없는 첨성대와 김알지 설화 속 닭이 울던 숲, 그 뒷길로 쭉 이어지는 교촌마을과 월정교까지를 걸으면 알고 있던 이야기도 새롭게 다가온다. 아무리 지겹도록 들어본 이름이라고 해도, 실물을 보면서 그 설명을 새롭게 듣는 것은 감회가 남다르다. 보다 직접적이다.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초등학생은 마침 내년에 받을 새 교과서에서 다룰 이야기를 미리 들어갔다. 하지만 우리식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최부자댁의 육훈보다 더 기억에 남을 이야기는 다른 것이었다.

야경투어 끝물, 코스의 마지막 목적지인 월정교 앞. 찬 바람이 귓바퀴에서 제법 요란한 소리를 내는데도 투어 참여자들이 모두 쫑긋 귀 기울일 이야기가 나왔다. 여기서 가장 많이들 하시는 질문, ‘저 다리 얼마나 들었어요?’. 그걸 왜 그렇게 궁금해하시나 몰라, 그래서 제가 알아봤습니다. 500억 원. 액수와 함께 사람들의 웃음이 터졌다.
 
 

걷고 또 걸어도 새로운 길


▲ 골목 구석구석에도 핫 플레이스가 가득한 황리단길을 걷다 보면 이런 이정표를 종종 마주치게 된다. 모두 하고 싶은 말은 다르지만 묘하게 하나의 세트처럼 이어지는 느낌이 독특하다.

첨성대를 비롯한 대표 유적부터 황리단길까지를 포함하는 경주 도심은 아주 평탄하게 펼쳐져 있지만 동시에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길의 경사가 심하지도 않고, 경관을 해칠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큰 건물도 없어 시선이 넓게 뻗는다. 그러면서도 시야 저 멀리께는 산등성이가 마무리해주어 개방감과 안정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 소박한 평야이자 거대한 공원 안에서는 무엇이든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동궁과월지까지 걸어볼 수도 있고,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황리단길까지 다시 걸어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렇게 걸으면 편도로는 얼추 3km, 관광스폿들을 둥글게 둘러 왕복하면서 여기저기 조금 더 둘러보면 너끈히 7km는 나오는 거리다.

그러는 동안 시끌벅적한 핫 플레이스의 소음과 노인정에서 담소 나누는 소리, 무언가 타는 냄새와 길거리 간식의 향긋한 냄새가 동시에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보이는 것은 고즈넉한 마을과 복원한 유적 뒤의 근대사와 오늘날의 이야기다. 위치적으로나 상징성으로나, 경주를 찾는 수많은 사람이 반드시 들를 수밖에 없는 자리 위 황리단길은 지역의 고유성과 궤를 같이하면서도 자기만의 개성이 가득한 각종 점포가 모여있다.


▲ 2층 한옥에 유리 자동문, 영어가 들어간 포스터 조합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들어맞는다. 한옥에 자리한 가게라고 해서 반드시 한글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주요 관광지 위치가 조금 발에 익은 둘째 날, 종일 황리단길에서 박물관까지를 몇 번이나 오가며 수없이 많은 사람과 낙엽과 시간이 흐르는 모습을 보았다. 아침에 봤던 가게가 점심쯤에 또 다르고, 점심쯤 마주쳤던 관광객이 노을 질 무렵에 또다시 나를 스쳐 지나갔다. 아마 내일은 새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같은 풍경이 반복될 것이고, 다음 주에는 새로운 핫 플레이스가 문을 열 것이다. 그러고 나면 유행의 사이클이 한 번 돌아간다. 그럼에도 경주는 어제와 같이 오늘처럼, 앞으로 또 한 세기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곳이다.

※ 위 내용은 기사의 일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사인문화 12월호를 참고하세요.

<SignMunhwa>

위 기사와 이미지의 무단전제를 금지합니다. 

관련 태그 : 경주 황리단길 첨성대 동궁과월지 월성교 비단벌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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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트렌드+디자인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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